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문단 편집) === 독립전쟁 === [[프랑스 제4공화국]]은 최초에 [[베트민]]이 수립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정식으로 인정해 주는 듯했으나 곧바로 입장을 바꿔 베트민 주도의 베트남 독립국가 건설을 인정하지 않았고 종전 후 베트민 지도자 호찌민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예비협정을 파기하며 북쪽으로 프랑스군을 진격시켰다. 1946년 11월 23일에는 [[하이퐁]] 항구에 [[프랑스 해군]]이 비행기 폭격을 동반한 함포사격을 가해 하루 동안 최소 6,000명의 베트남 시민이 사망했다.[* 자료의 출처는 D.F Fleming, The Cold War and Its Origin이고 이 자료는 [[리영희]]가 쓴 전환시대의 논리에도 나온다.][* 100명 미만에서 2만명까지 여러 의견이 있지만 서구 학자들은 대체로 6천명 이상으로 본다.] 1946년 12월 19일, 호찌민은 프랑스군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이것이 사실상의 '''베트남 독립전쟁'''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이었다. 프랑스는 이 전쟁에 프랑스인 233,467명, 외인부대 72,833명, 북아프리카인 122,920명, 아프리카인 60,340명 등 막대한 병력을 투입했다. 여기에 베트남인 병력[* 형식상으로는 [[베트남국]]의 군대였지만 실질적으로는 프랑스군 산하의 보조군이었다.]도 추가되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1947년에 CEFEO, 프랑스 극동원정군은 인도차이나에서 11만 5천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6.25 전쟁]] 등의 발발로 미국의 개입이 본격화되는 등 전쟁이 절정을 향해 가던 1951년과 1954년 사이에는 17만 5천명에 달했다. 이들은 5만 4천명의 프랑스 육군[* 비시 프랑스 정권 치하에서 독일의 외인부대에 가담하는 등 부역자 중에서도 죄질이 악질적이라 40년대 후반까지 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이들도 일부가 비밀리에 특채되어 전장에 투입되기도 했다.], 1만 8천명의 서아프리카인, 3만명의 북아프리카인[* 알제리 등 북아프리카 출신 대원들은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 말로가 좋지 못한 경우가 적지 않다. 고향으로 복귀한 후 일부는 알제리 민족해방전선으로 전향해 프랑스군에 맞서거나 또 다른 일부는 프랑스에 저항하지 않고 살다가 프랑스의 철수 이후 프랑스군에서 복무하던 전적이 문제가 되어 현역 시절 수여받은 훈장을 강제로 삼키는 등의 고문을 당하고 처형되는 등 많은 수가 인도차이나 전쟁 이후에 무슨 선택을 했건 고통스러운 말년을 보내야 했다.], 2만 명의 외인부대원[* 독일 국방군과 무장친위대, 이탈리아 왕국군에서 복무한 독일인과 이탈리아인 등과 동유럽이 소련에게 점령당하면서 나라 잃은 부랑아 신세가 된 폴란드인 등이 프랑스 외인부대에 투신하는 경우도 있었다. 포로가 된 외인부대의 몇몇 독일인 대원들은 입대를 원하지 않았는데 2대전 이후 강제로 프랑스군에 편입되었다며 베트남 인민군 포로 심문자들에게 털어놓기도 했는데 정확한 진위 여부는 불명. 열악한 포로수용소 생활을 몇년씩 해야 했던 타 프랑스군 포로들과는 대조적으로 이런 독일인들은 바로 동독으로 송환된 경우도 있다.], 5만 3천명의 프랑스의 지휘를 받는 베트남인, 5천명의 해군, 1만명의 공군, 현지인 보조병 5만 5천명으로 구성되었다. 1953년부터는 [[바오다이]] 황제의 통치 하에 있던 [[베트남국]]의 군대인 베트남 국민군 15만명이 추가되었다. 인상적인 규모이지만 대게릴라전의 특성 등의 이유로 대부분의 병력은 방어적인 진지전 임무를 수행했고 1953년 기준으로 기동전에 투입 가능한 병력은 7개 독립여단과 8개 공수대대, 소수의 강상 순찰부대로 국한되어 전체 병력에 비해 상당히 적었다.[* 오스프리 맨앳암즈 프렌치 인도차이나 전쟁 1946-1954 출처] 그리고 [[보응우옌잡]][* 흔히 이름의 끝 글자를 따서 "잡" 장군이라고 불리는 사령관] 장군이 이끄는 베트민군은 압도적인 프랑스군에게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은 후 북부 산악지역으로 패퇴하여 [[게릴라]]전으로 프랑스군과 싸우게 되었다. 1947년 10월 프랑스군은 비엣박을 대대적으로 공격하여 호치민이 체포될 뻔하기도 했다. 이후 4년 동안 베트민은 소극적 게릴라 공세를 계속하며 그 사이 정치 운동을 통해 북부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고 민중의 압도적 지지를 얻는 데 성공했다. 반대로 [[프랑스]]는 [[알제리]], [[튀니지]], [[모로코]], [[세네갈]], [[마다가스카르]] 등 다른 프랑스령 해외 식민지에서의 독립 운동이 가중되면서 전력이 분산되기 시작했고 "전후 재건에도 사람이 부족한데 애먼 전쟁터에 젊은이들을 내몰아 또 죽일 거냐"는 국내 여론의 악화와 미국, 영국 등 여타 서방 국가들의 외교적 압력으로 서서히 베트남에서의 우위를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하필 [[샤를 드골]]은 외아들인 필리프 드골을 베트남에서 잃을 뻔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